트로멜린 섬 (트로믈랭 섬)의 비극: 황량한 모래섬에 15년간 고립됐던 사람들
트로믈랭섬(프랑스어: Île Tromelin)은 레위니옹에서 북쪽으로 약 500km, 또 마다가스카르에서 동쪽으로 약 450km 떨어진 인도양의 섬이다.
모리셔스는 1814년 파리 조약의 프랑스판 제8항에 이 섬이 나열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섬의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다. 프랑스와 모리셔스는 이 섬의 공동 관할과 관련하여 수년 째 협상 중이다.
1760 년 11 월 17 일 바욘을 떠난 후 1761 년 7 월 31 일 프랑스 동인도 회사 소속 선박 인 Utile이 Île de Sable (오늘날 : Tromelin Island – 마다가스카르 해안에서 1km2의 사막 섬)에 떠밀려 왔습니다.
그 배는 160명의 마다가스카르 노예를 수송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나라 밖으로 밀반출되어 일드프랑스(지금의 모리셔스)로 팔려고 했습니다.
선원들은 80명의 노예를 섬에 남겨두고 뗏목을 타고 마다가스카르로 돌아갔으며, 다시 돌아와 그들을 구출하겠다는 약속을 했습니다.
불과 15년 후인 1776년 11월 29일, 소위이자 미래의 기사인 트로믈린(Tromelin)이 코르벳 La Dauphine의 지휘관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는 살아남은 여덟 명의 노예들, 즉 7명의 여자와 1명의 8개월 된 아이를 구출했다.
루틸 호에는 당초 122명의 백인 선원들과 160명의 흑인 노예들이 타고 있었다.
그러나 루틸 호는 '트로믈랭' 섬 인근에서 좌초되고, 지하 갑판아래에 감금되어있다시피했던 160명의 말라가시 인들 중
수십명이 사망하고 겨우 살아남은 것은 60여 명 뿐이었다. (이 수치는 학자마다, 알려진 매체마다 다르다.)
이들 중 백인선원들은 겨우 건진 얼마남지않은 배의 식량을 흑인들에겐 거의, 혹은 아예 나누어주지 않았으며
이로인해 배고픔과 목마름에 시달린 흑인들 중 또다시 다수가 사망했다.
1761년 7월
바게트국 선장이 마다가스카르에서 노예를 싣고 출항
(바케트 선원 142명, 흑인노예 160명, 흑인노예는 고지대 산골출신들)
가다가 트로멜린섬 암초에 좌초되고, 그 충격으로 선장 정신이상자 됨
이후 바케트 선원 122명 최종 생존, 노예들은 60명만 생존
선장 휘하의 부하중에 카스텔란이 대장으로 승격한 후 총지휘를 맡음
좌초난파된 배에서 사용가능한 모든 것을 가져다가 베이스캠프 설치
다행히 섬에서 우물 두 곳을 개발성공, 의식주 해결가능
난파선을 이용해서 보다 작은 배 건조성공
1761년 9월
바케트 선원 122명 배타고 4일만에 마다가스카르로 탈출성공
남은 흑인노예 60명에게는 반드시 다시 돌아와서 구조해주겠다 약속함
카스텔란이 인성은 나름 준수해서 계속 당국에 이들의 구조를 요청
당국(바케트국 식민지쪽) 계속 생까고 던져버림
바케트 본국까지 이야기가 전해졌고, 이슈가 되었으나, 어느 순간 잊혀지기 시작
1773년(12년 후)
지나던 배에서 트로멜린 서식인들을 발견했으나 좌초위험으로 섬에 접근 실패
1774년
다시 구조선이 섬에 접근하려했으나 악천후로 접근 실패
이 과정에서 남자선원 한 명이 실종되고 구조선은 떠남
실종 남자선원은 트로멜린섬에 구사일생으로 도달해서 살아남
그동안 남자 및 여자들이 뗏목을 만들어서
바다로 뛰어들었으나 모두 시망한 것으로 정리되고
남자 몇 명, 여자 몇 명정도만 생존하고 있었음.
1775년
뗏목을 만들어서 남자 3명, 여자 3명이 탈출을 시도
그러나 이것이 마지막 탈출시도였고 좃망으로 끝남
1776년 11월 (15년 후)
트로멜린함장의 지휘하에 이 섬 도달에 성공
생존자 성인여자 7명, 생후 8개월 아이 한 명 생존확인
최후의 남자가 1~2년전 까지는 살아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부분임.
섬에서 나온 후 이 여성들은 기독교로 세례를 받은 것으로 전해지고,
그 후손들도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는 것으로 전해짐.
2006~2013년
바케트국에서 이섬에서의 생존서식에 대한 탐구 및 탐색을 시작
온갖 생존서식 도구 및 기술을 발굴하고, 박물관까지 만들어서 전시.
프랑스 당국은 남겨진 흑인 노예들을 구조하려고 몇 차례 시도했으나, 당시 제국주의적 정치 상황과 불법 노예 무역 문제가 겹치며 구조는 지연되었다. 15년간의 고립 끝에, 1776년 프랑스 구조대가 섬에 도착했을 때는 7명의 여성과 8개월 된 아기만이 살아남아 있었다. 이 비극적인 사건은 프랑스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고, 트로멜린 섬은 그 후 노예 생존의 상징적인 사건지로 알려지게 되었다.
현대에 들어서 과학자들이 트로멜린 섬을 재조명하면서 이 생존 사건에 대한 연구가 이어졌다. 2006년부터 2013년까지 프랑스의 막스 게로 박사는 섬을 탐사해 고립된 흑인 노예들의 생활 흔적을 발견했다. 그들이 남긴 주거지와 식량 자원, 식기류 등이 연구되었고, 생존자들은 약 9만 마리의 새와 수천 마리의 거북을 먹고 버틴 것으로 추정된다. 과학자들은 이 사건을 통해 그들의 생존 방식과 끈질긴 삶의 방식을 밝혀냈다.
댓글
댓글 쓰기